윤동주의 이 <서시>는 너무나도 유명한 시입니다. 그러나 유명한 것만큼 그렇게 정밀하게, 그리고 자세히 이 텍스트가 읽혀진 일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난해한 말도 없고 난삽한 이미지와 상징성도 없습니다. 별이니 잎이니 바람이니 하는 말들은 일상적인 쟁활과 시어에서 많이 씌어진 것들입니다. 그런데도 이 시는 잘못 읽혀져 오는 경우가 많습니다.
특히 윤동주 씨는 항일 운동을 하다가 객지 일본 땅에서 객사를 한 시인이며 기독교 신자기 때문에, 시를 읽기 전부터 벌써 어떤 준비된 의미의 틀을 갖고 대하게 되는 경우가 많은 것입니다. 그래서 “나한테 주어진 길을 / 걸어가야겠다”라는 시구를 놓고도, 사람에 따라 독립 운동이라는 정치적 의미의 층위에서 읽을 수도 있고, 종교적인 층위에서 읽을 수도 있게 됩니다. 물론 시인으로서의 길, 즉 예술적 층위에서 읽으려 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독립 운동의 길, 종교적 순교의 길, 혹은 아름다움을 구하는 언어의 길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잠시 우리가 윤동주의 전기적 요소를 잊고, 씌어진 시의 구조, 언어로 이루어진 순수한 건축물의 구조만을 가지고 읽어보면, 그와 같은 고정된 시점이 아니라 좀더 자유로운 의미의 생성과 접하게 될 것입니다.
1. 하늘과 땅의 대립 공간 우선 1행에 쓰인 단어들을 단독적으로 파악할 것이 아니라 다른 말들과의 연관성에서, 즉 구조적인 의미의 요소로서 파악해 봅시다.
1행에는 “죽는 날까지”라는 시구가 나옵니다. 두말할 것 없이, “죽는 날까지”를 다른 말로 바꾸어 보면 ‘살아 있는 동안’이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시구에서 죽음과 삶이라는 대립되는 의미소와 이 대립의 축을 이루는 것은 시간으로서, 공간과 대립되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여러 번 이야기합니다만, 의미란 차이고 이 차이는 대립을 통해서 명확해지지요. 그렇다면 이 1행의 시구만을 읽어도, 다음에 이것과 어떤 것들이 서로 얽혀져 있는가를 쉽게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바로 다음에 ‘하늘’이라는 말이 나오는데 앞의 죽음과 생, 그리고 시간이라는 의미소와 관련 지어질 때 당연히 하늘의 의미소가 어떤 것인지 몇 개의 특성을 알게 됩니다.
우선 하늘과 앞의 시구와는 강렬한 대응성으로 연결될 수밖에 없지요. 하늘을 하늘이게끔 차이화하는 것은 두말할 것 없이 땅이라는 것입니다. 하늘 - 땅은 서로 붙어 다니는 것으로, 하나는 높고 하나는 낮습니다. 그리고 시간축으로 볼 때 하나는 불변 영원한 것이고, 또 하나는 변하는 것이며 한정된 것입니다. 더구나 하늘을 ‘우러러’라는 말은 현재 화자가 어디에 있는가를 극명하게 보여 줍니다. 우러러란 말은 낮은 곳에서 높은 곳을 치켜 보는 것이기 때문이지요. 하늘을 우러러 보는 사랑은 이 시의 표면에는 나타나 있지 않지만 땅에 있습니다. 지상적인 한계에서 천상적인 영원한 것을 염원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습지 않습니까. 이렇게 보면 옛날 천자문이 천지현황이라는 말로 시작되듯이 윤동주의 <서시>는 천지라는 우주 공간, 하늘과 땅이라는 두 공간과, 유한한 시간과 무한의 시간이라는 두 축으로 그 의미의 발판을 만들어 내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러면 자연히 그 다음 2행에 등장하는 “부끄럼이 없기를”의 그부끄럼이 무엇인지, 시적인 의미보다도 그 논리적 구조에 있어서 파악할 수 있게 됩니다.
대체 무엇에 대한 부끄럼인지요. 아주 단순합니다. 하늘과 땅이라고 할 때 공간적인 것으로 그 의미소를 추출하면 위와 아래입니다. 부끄러운 사람은 고개를 숙입니다. 땅을 보지요. 영혼은 어디로 가지요? 하늘. 그래서 사람이 죽으면 천장에 구멍을 뚫어 놓는 민족이 있는가 하면 굴뚝을 뚫어 놓는 종족들도 있습니다. 영혼이 하늘로 빠져 나가라고요.
1,2행은 모두가 하늘과 관련된 것이고, 그 하늘의 공간은 바로 3,4행과 대응을 이루고 있습니다. ‘잎새’라는 말이 그렇지요. “잎새에 이는 바람”을 바라보는 이 시의 화자의 시선은 높은 하늘에저 낮은 지상으로 내려 이동해 온 것입니다. 그리고 부끄러움은 괴로움이라는 말로 변하지요.
2. 잎새의 의미 자, 그러면 1,2행과 3,4행이 어떤 의미의 병렬 판계를 갖고 서로 유기적인 관계, 즉 구조적인 의미를 띠게 되는지 그 짝을 이루는 낱말들만 살펴봅시다.
하늘을 우러러볼 때의 부끄럼이 없는 마음은 땅을 굽어볼 때에는 괴로움을 느끼는 마음이 됩니다. 만약 잎새에 이는 바람에 아무런 괴로움을 느끼지 않는 사람이라면 어떨까요. 하늘을 부끄럼없이 우러러볼 수 있을까요. 그렇지 않지요. 하늘을 우러러 부끄럼을 느끼지 않는 맑고 순결한 마음을 가진 자만이 비로소 지상에서의 괴로움을 느낄 수 있는 사람인 것입니다.
“잎새에 이는 바람”이란 잎새를 시들게 하는 것, 즉 수시로 변하게 하는 힘입니다. 잎새에 작용하는 시간인 것입니다. 하늘이 영원이라면 땅은 잎새의 순간적인 삶이 있습니다.
더구나 우리가 조심해야 할 것은 “잎새에 이는 바람에로”의 그 조사 ‘도’입니다. 잎새란 아주 작은 것입니다. 무리져 있는 것들의 하나입니다. 꽃처럼 아름답지도 않으며 나뭇가지처럼 튼튼한 것도 아닙니다. 하잘것 없는 생명의 개체들이지요.
잎새라는 말은 나뭇가지, 등걸, 뿌리(그것이 풀잎의 경우에는 더욱 그렇지요), 이렇게 자꾸자꾸 잎새가 소속되어 있는 공간으로 가면 흙이 되고 전체 대지가 됩니다. ‘잎새에도’가 붙어 있다는 것은 다른 것들은 말할 것도 없다는 것이니, 이 괴로움은 지상적인 모든 것을 내포하게 됩니다. 하늘처럼 영원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수시로 변하고 시들고 죽는 생명을 가진 지상의 것들입니다. 그런데 괴로움 앞에 ‘나’가 강조되어 있습니다. 나와 잎새는 괴로움으로 맺어져 있습니다. 잎새에 이는 바람은 나에게도 이는 바람인 것이지요. 직접 나에게 부는 바람이 아니라도, 지상의 개체들은 그 이는 바람 속에서 같은 변화, 같은 아픔을 느낌니다. 타인의 고통, 그것은 나의 고통이 되는 것이지요.
이 하늘과 땅의 관계, 부끄럼 없는 마음과 괴로워하는 마음, 그리고 잎새와 바람의 의미들은 5~8행에서 더욱 발전되고, 그 구조의 틀을 더욱 견고하게 만들어 갑니다.
3. 하늘의 별, 땅의 잎새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의 시구에서, 앞에 나왔던 부끄럼 없는 마음과 괴로움이라는 마음이 힐씬 더 구체화된 것입니다. 놀랍지요. 여기의 별은 하늘의 공간인 첫 번째 1행과 맞물리고 있습니다. 동시에 그 별은 3행의 잎새와도 대응됩니다. 도식으로 그관계를 나타내면 하늘과 별의 관계는 땅과 나뭇잎의 관계와 각기 대응을 이룹니다. 그것을 도식으로 나타내면 다음과 같습니다.
하늘 ‥‥‥‥‥‥‥ 별
. .
. .
. .
땅 ‥‥‥‥‥‥‥‥ 잎새
하늘을 우러러보는 마음은 바로 별을 노래하는 마음과 동격입니다. 하늘의 공간에 걸리는 마음입니다. ‘하늘’은 ‘별’로, ‘우러러’라는 행위는 ‘노래하는’ 것으로 바뀌었습니다. 별은 하늘에 내포되고, 노래는 우러러에 포함되는 함수 관계를 갖게 됩니다. 공간과 행위의 두 축이 5~8행에 와서 반복, 변이된 것입니다. 음악의 변주처림 말입니다. 땅의 축, 즉 잎새축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모든 죽어 가는 것을 사랑해야지”의 6행으로 변전되고 있습니다. 보십시오. ‘잎새에 이는 바람’은 ‘모든 죽어 가는 것’과 같은 의미입니다. 즉 구상적이고 개별적인 것이 추상화되고 일반화한 것이지요. 그러므로 1~4행의 하늘이 별로 개별화되고 구상화된 것과 반대로, 1~4행의 잎새와 바람은 추상화와 일반화로 교체되어 있습니다.
마음의 상태는 어떠한 변화와 대응성을 보여 주고 있는지를 정리해 보십시오. 천상으로 향한 마음은 부끄럼 없는 순수성에서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지상으로 향한 마음은 괴로움에서 사랑하는 마음으로 짝을 이루게 됩니다. 의미의 성격으로 보면 한결 강화되고 부정축에저 긍정적인 것으로 나가고 있지요.
노파심에서 “별을 노래하는 마음”과 “모든 죽어 가는 것을사랑해야지”가 인접 관계임을 알아봅시다. 별은 모든 죽어 가는 것과 정면에서 반대되는 의미소를 갖고 있습니다. 별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영원히 빛나지요. 어둠은 별을 죽이지 못합니다. 오히려 어둠이나 밤은 별을 빛나게 합니다. 그러나 바람 속의 잎새는 그렇지가 않지요. 모든 죽어 가는 것들이 있을 뿐입니다.
그 괴로움이 사랑으로 변하는 것은(사랑이라는 감정은 영원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별을 노래하는 마음이 있기 때문에, 땅에 있으면서도 하늘을 우러러보는 마음이 있기 때문에, 부끄럼 없는 순수한 마음이 있기 때문에 비로소 모든 죽어 가는 것을 사랑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하늘이 땅과 합쳐지는 모순의 통합이 이루어집니다. 성공한 모든 시가 그렇듯이 모순을 합일시키는 시적 구조를 통해서 별은 하늘의 잎새가 되고, 잎새는 땅의 별이 되는 의미 교환과 대입이 가능해지는 것입니다.
‘사랑’은 괴로움(지상)에서 나오는 것이며 동시에 노래하는 즐거움(천상)에서 나옵니다. 사랑은 모순된 감정, 모순된 공간, 높고 낮은 불변과 변화, 죽음과 영원의 배율적 개념 사이에서 형성되고 있음을 뚜렷하게 볼 수가 있습니다. 그것이 7,8행에 나오는 길의 통합 공간입니다. 좀더 자세히 이야기합시다.
4. 천지인(天地人), 또는 길의 공간 5~8행에서도 1~4행처럼 ‘나’라는 주어가 나옵니다. 하늘, 땅 그 사이에 내가 있습니다. 천지인(天地人). 참으로 오래된 동양의, 한국의 공간이지요.
하늘의 길, 땅의 길, 그런데 여기 또 하나의 길이 있습니다. ‘나한테 주어진 길’입니다. 세 공간이 나왔지요. 하늘의 공간(불변 영원의 공간), 땅의 공간(변하고 죽어 가는 것들), 이 사이에 길이라는 공간이 있습니다. 하늘을 우러러 부끄럼 없는 길이요, 잎새에 이는 바람을 보며 괴로워하는 길이요, 별을 노래하고 모든 죽어 가는 것을 사랑해야 하는, 길의 제3공간입니다. 그것이야말로 시적 공간, 하늘과 땅을 융합시키는 인간의 운명적이면서도 창조적인 공간인 것입니다.
그런데 길이란 정적인 공간, 결정된 공간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끝없이 전개되며 시작과 끝이 있어서 과정을 갖는 동적인 공간입니다. 길에서는 서 있을 수가 없습니다. 길은 걷는 공간으로, 지향점을 지닌 공간인 것입니다. ‘사랑해야지’라는 행동은 ‘걸어가야지’로, 즉 목표를 향해 나아가려는 의지의 행동으로 다시 변이됩니다.
침묵의 행을 건너뛰어 <서시>는 한 행으로 마지막 연을 맺습니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길 위에서는 늘 현재입니다. 걷고 있는 나, 그것이 ‘오늘도’라는 진행형입니다. 잎새에도 의 ‘도’처럼, 윤동주 시인은 산문적인 조사를 시간이나 공간을 나타내는 데 매우 암시적인 공백의 말로 잘 사용하고 있습니다. 어젯밤도 그랬고 오늘 밤도 그랬고 내일밤도 그럴 것입니다. 이 ‘도’는 지속성을 나타내는 현재로서의 그 ‘도’입니다.
하늘과 땅의 공간이 오늘이라는 시간으로 바뀌자 다시 그 바람이 나오고 있습니다. 그런데 잎새에 이는 바람이 아니라 그것은 지극히 높은 하늘의 별에 스치는 바람입니다. 괴로운 바람 - 잎새를 시들게 하는 변화의 상징인 그 바람, 그러나 별은 바람에 흔들리지 않습니다. 바람은 별을 시들게 하지 못하지요. 폭풍이라 할지 라도‥‥‥.
별을 노래하는 마음이 모든 죽어 가는 것들을 사랑하는 것과 같듯이, 여기에서는 잎새에 이는 바람이 스치는 바람이 됩니다. 하늘과 땅 사이에 사람이 있습니다. 시인이 있습니다. 윤동주가 있습니다. 그런데 잎새와 별로 암시되는 그 땅과 하늘 사이에는 바람이 있습니다. 바람이 모든 것을 바꿔 놓는 힘이요 운명이듯, 시인도 윤동주도 모든 것을 바꿔 놓는 힘이요 운명인 것입니다. 잎새에 이는 바람에는 괴로워하지만, 별에 스치우는 바람에는 환희와 사랑의 마음이 있습니다. 영원을 향한 의지의 길이 있는 것이지요.
5. 소리의 텍스트 그러나 이런 의미 구조만으로 시가 이루어지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시는 언어의 의미만이 아니라 그 소리, 음운 구조에 의해서 분절되고 조직화됩니다. 의미 분절은 음운의 분절에 의해서 육체화되는 것이지요.
하늘과 땅의 의미가 대응되는 시구는 자연히 음운 구조에 있어서도 어떤 매듭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자 1,2행의 하늘과 3,4행의 땅을 나타낸 시구를 보십시오. “하늘을 우러러 / 한 점 부끄럼이......”에서 하늘의 ‘하’와 한 점의 ‘한’은 기묘한 두운을 이루고 있습니다. 그리고 거기에 대응하는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에서는 잎새의 ‘이’와 이는 바람의 ‘이’라는, 역시 한쌍의 두운을 보여줍니다.
마찬가지로 마지막 연의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에서 ‘ㅂ’의 두운이 반복되어 있습니다. 한국의 시에서는 운이 없다고 해도 좋을 정도로 미미하지만, 이따금 두운은 시적인 의미 구조에 중요한 역할을 하기도 합니다.
6. 형태의 텍스트 따라서 형태적인 것, 통사 구조에 있어서도 이 시는 그 시적 구조의 특성을 뚜렷이 보여 줍니다.
즉 1~4행은 과거형으로 서술되어 있습니다. 서술 종지형이 “괴로워했다”라는 과거입니다. 그런데 5~8행은 “사랑해야지”와 “걸어가야겠다”로, 모두 미래 추정형인 원망이나 미래의 의지를 다짐하는 서술형입니다. 그리고 시의 끝 줄은 “오늘 밤에도 [‥‥‥]스치운다”로 현재형 입니다.
① ‥‥‥ ④ 과거
⑤ ‥‥‥ ⑧ 미래
⑨ ‥‥‥‥ 현재
단순히 시제만이 아닙니다. 이 <서시>는 자기가 자기에게 들려주는 자성의, 혹은 다짐의, 혹은 기도의 톤으로 되어 있습니다. 만약 이것을 명령문으로 고치거나, 전체를 과거 서술형이나 단정적인 목소리로 썼다면 그 시적 전달은 아주 달랐을 것입니다.
특히 2연을 그냥 과거 서술형으로 썼다면 어떻게 되었을까를 생각해 보면 압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 가는 것을 사랑했노라.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갔느니”라고 한다면 어떤 느낌을 줄까요. 선언문이나 위선적이고 오만한 목소리로 들릴 것입니다.
미래 추정형은 현재는 그렇지 않다는 반의적인 의미를 띠고 있습니다. ‘해야지’라는 말은 현재는 ‘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함축하고 있습니다. ‘사랑해야지’라는 것은 현재는 모든 죽어 가는 것을 사랑하지 못하고 있는 반대의 뜻을 나타내 주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어가야겠다’는 목표를 향한 구도의 길, 순례의 길과 같은 것을 향해 떠나려고 하는 다짐이니만큼 그것 역시 현재 걷고 있는 것이 아님을 시사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미래 추정형의 서술에는 현재와 미래, 그리고 현상과 원망 사이의 틈에서 생겨나는 역설적인 의미의 긴장이 있게 됩니다.
특히 현재형으로 되어 있는 이 마지막 행에는 다른 행과는 달리 자신의 감정을 나타내는 일체의 주관적 표현, 괴로움이니 부끄럼이니 사랑이니 하는 말들이 일체 배제되어 있습니다. 순수한 즉물적 묘사로 되어 있는 것이지요. 그것은 과거를 회상하거나 앞날을 다짐하는 주관적인 의식의 시간이 아니라, 현재라는 객관적 상황이 눈앞에 그려져 있을 뿐입니다. 현재형이 갖는 미확정 또는 그 긴장감이 모사적인 서술내용과 일치되어 있습니다.
7. 상황적 의미와 구조적 의미 이와 같은 분석을 통해서, 우리는 시를 시적 구조의 층위에서 읽지 않고 전기적, 상황적 층위에서 읽는다는 것이 얼마나 위험하고 또 비(非)시적인 것인가를 실감하게 될 것입니다.
정치적 층위에서 읽으면 이 <서시>는 항일 저항시가 되어, “오늘 밤”의 밤은 식민지의 암흑기가 되고 ‘별’은 해방과 독립의 희망이 됩니다. 그리고 “잎새에 이는 바람”은 우리 민중에게 다가오는 일제 침략자가 될 것입니다. 두말할 것 없이 “나한테 주어진 길”은 독립의 길이 될 것이고.
결국 그렇게 되면 우리가 일제로부터 벗어나 해방과 독립을 이룩한 오늘날에는 <서시>의 감동은 변질·반감될 것이고, 상황의 변화에 따라 그 의미도 묵은 신문처럼 퇴색하고 말 것입니다. 만약 감동이 있다 하더라도 독립기념관의 유물과 같은 반성과 교훈성이 강한 것이 되고 말 일입니다.
지금 읽어도 이 시의 감동이, 그리고 그 상징성이 짙게 전달되는 것은, 이 시의 구조가 외부의 정치적 층위에 의존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자율적인 구조, 좀더 풀어서 이야기한다면 외부적 상황과 단절되어도 그 안에서 의미를 생성하는 특수한 내재적 구조를 가지고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쉬운 말로, 일제 식민지와 관계없는 역사 속에서 살았던 서구인들이 읽어도, 심지어 그를 고문했던 일본 관헌들이(시적 감수성을 지니고 있었다면) 읽어도 이 <서시>는 아름다운 감동을 일으켜 줄 것입너다.
한편 종교적 층위에서 인는다면 이 <서시>는 아주 또 달라집니다. “모든 죽어 가는 것들”은 죄의 값을 짊어진 모럴(mortal, 죽어야만 하는 인간 존재)로서 국적과 관계없이 전세계의 인류가 될 것입니다. 물론 그 사랑 역시 민족애가 아니라 원수까지도 사랑하라는 기독교적인 사랑, 아마도 저항은커녕 우리를 괴롭혔던 식민지 통치자인 일본인까지도 사랑해야 되는 그런 보편적인 인간애(人間愛)가 될 것입니다. 또 “나한테 주어진 길”은 순교자의 길이 될 것이고, 물론 ‘별’은 원죄를 지은 인간에게 내리는 신의 은총, 동방 박사가 보았던 그런 별빛으로 해석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정치적 층위로 읽었을 때처럼 종교적 층위에서 읽으면, 비기독교인에게는 아무런 감흥을 주지 못할는지도 모릅니다. 정치적 상황이나 종교적 이데올로기를 모두 제외하여도 이 시가 시로저 존재하는 것은, 거듭 말하자면 이상에서 살펴본 대로 반대의 것을 통합하는 시적 긴장과 상상력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라고 할 것입니다.
앞에서 분석한 것처럼 <서시>는 분명히,
땅(잎새) vs. 하늘(별)
의 대립되는 두 개의 공간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러나 바람은 이 두 대립 공간을 넘나듭니다. ‘잎새에 이는 바람’은 ‘별에 스치는 바람’이기도 한 것입니다. 바람은 지상의 잎새와 천상의 별에 같이 관여합니다. 마찬가지로 ‘나’ 역시 하늘이 별을 노래하는 마음과 동시에 잎새에 괴로워하는 마음으로, 위아래로 같이 관여하고 있습니다. 하늘과 땅을 매개하는 것은 바람과 나입니다.
별이 밤에 의하여, 말하자면 어둠에 싸여 비로소 빛나듯이, 나는 바람에 싸여 비로소 생명과 사랑의 빛을 얻어냅니다. 잎새에 이는 바람에 괴로워하는 부정의 밤이 있기에, 모든 죽어 가는 것을 사랑하는 긍정의 마음이 생성됩니다. 어느덧 별과 밤의 관계는 나와 바람의 관계와 같은 패러다임을 형성합니다.
별 : 어둠 vs. 나 : 바람
별에 의해저 어둠의 부정이 도리어 긍정으로 변환되듯이, 별노래하는 나(시인)에 의해서 괴로움을 주는 바람은 사랑을 불러일으키는 바람으로 변화합니다.
여기에서 하늘과 땅은 대립 공간이 아니라 혼합·변형되어, 반대의 일치라는 고전적 양의성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밤과 바람은 같은 것이 되고, 별과 나는 그것들 속에서 빛과 불변성을 얻어가는 가역 반응을 보이는 것입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별과 나의 동일화는 지상적인 것을 천상적인 것으로 반전시키는 것이 되지요.
한마디로 윤동주의 우주 공간은 죽음 속에서 얻어지는 생이고 유한 속에 쉽싸인 무한이라는 역설과 양의성을 지닙니다. 이것이 바로 윤동주가 창조한 공간이지요. 어둠이 있어야 비로소 빛이 나는 별, 모든 것을 변하게 하는 바람이 있어야 반대로 불변의 사랑을 낳는 ‘나’, 그리고 ‘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