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젖은 눈빛1 (외10수)
-두만강변에서
리순옥
묵상에
갈앉은 가슴
하얀 치마저고리 입은
할머니 할아버지
괴나리보짐과 쪽박 지니고
걸어오시는듯
물결우에 이는
차거운 바람과
내리는 쓸쓸한 비와
그리고 퍼렇게 멍들어가는 하늘
가슴에 손을 얹고
강변에 굳어있다
나는 누구인가?
차고 아픈 바람이
뒤잔등을 자꾸 밀어간다
젖은 눈빛2
-사이섬에서
쓸쓸하고 황량한 사이섬
누르스름한 풀들은 이리저리 넘어지고
거멓게 색 죽은 나무들 오불꼬불 서있고
그제날 조상들의
하염없는 한을 새김질하듯
바람에 퍼런 소리 사르고
묵묵히 흘러가는 두만강이
눈물과 피의 소리를 하늘가에 물들여간다
젖은 눈빛3
-두만강변에서
벌레들과 풀들과
나무들과 새들과 맹수들과 그리고
사나운 비바람 엇섞여
모진 풍경 이뤘을 이 초야의 땅에
조상들의 그림자는 비껴들고
그 흔영의 자욱따라 끝없이 걷는다
젖은 눈빛4
-선구촌에서
혹 할머니 할아버지
첫 자욱 찍었을지도 모르는 이 터전
하얀 회칠벽은
변하지 않는 고유의 멋 풍기고
빨갛고 파란 기와들은
얼기설기의 검붉은 삶 얘기하는듯
두런두런 들리는 우리말소리
하얀 치마저고리 입고 오가는 사람들
하나의 숨결이
두만강우를 무랍없이 오간다
젖은 눈빛5
-산과 들을 보며
산과 들
심산밀림속에
쉼없이 땀 흘리는 흰 사람들
흔영 보이는듯
손에는 호미와 쪽박 잡고
발로는 씨뿌려진 흙곬을 덮고
간민(垦民)이란 아픈 이름
등에 달고
간토(垦土)의 주인되여
검푸른 삶을 사른
산과 들, 심산밀림속에
쉼없이 땀 흘리는
흰 사람들 흔영 여직 보이는듯
젖은 눈빛6
-서전서숙옛터에서
1
글 한자, 말 한마디로
어두워져가는 하늘에
사그라지지 않는 하얀 숨결 바랜
비바람속의
검푸른 아픔을 주얼거리듯
해묵은 나무들은
바람에 가지들을 한껏 날리고
교정에서 랑랑히 들리는 글소리
즐겁게 뛰노는 동심들
오랜 세월의 회한을 사그리며
바람과 향기와 빛들은
말과 글, 삶과 족(族)에 대해 아우른다
2
말과 글을 이어가는것은
“나”와 내 “족(族)”을 벼리는 일
말과 글을 벼려가는것은
“나”와 내 “족”을
생명기(生命气) 흐르게 하는 일
말과 글을 생명처럼 소리나게 하는것은
“나”와 내 “족”을
꿈과 혼으로 바래게 하는 일
젖은 눈빛7
-사과배 련상
두만강너머의 배나무가지와
연변의 돌배나무뿌리 살 섞어 맺은 열매
껍질은 단단하고 속살은 하얗고
거센 비바람속에서도 쓰러지지 않고
하얀 삶 파랗게 벼려낸
할머니 할아버지 혼인양
그리고 산설고 물선 이역땅에
단단히 뿌리내리고
가지속 살과 뿌리속 물기 용해하여
검붉은 삶 령롱히 사른 조상들의 넋인양
그 혼과 넋이 하얗게 흐르는 속살을
입에, 가슴에, 혼령에
녹인다
젖은 눈빛8
-룡정거리에서
스쳐가는 바람에 비껴가는 옛 풍경들
용드레 우물가의
하얀 초가집들과
해란강벌에서 땀 흘리는 흰옷 입은 사람들
줄느런한 학교들의 랑랑한
훈민정음소리와 거리에 익는 우리 말소리
비암산의 푸르른 기운과
일송정의 검푸른 숨결
거리와 벌판의 검붉은 함성과
멀리에 밝은 명동의 하늘…
족(族)의 숨결 빛내려는 파란 신념들
령혼을 진붉게 물들인
하많은 피빛사연들과 별같은 이름들이
어둠의 밤하늘을 반짝이며 스치는
룡정의 유서깊은 거리에
난 오래 굳어서있다
젖은 눈빛9
-연길의 하늘가를 일별하며
내 혼이 익는 도시
눈빛과 숨결과 혼령은
이 하늘가에서 오색으로 물들고
바래지 않는 족(族)의 하얀 숨결 벼려
령롱한 빛언덕으로 달려가는 내 혼이
빨갛게 익는 도시
젖은 눈빛10
-백두산기슭에서
백두산의 풀과 꽃, 나무와
새
구름과 하늘에 핀 하얀 숨결들의 꽃
단군의 눈빛이 그대로 익는 혼들의 웨침
백두산정의 적설은
그 웨침을 하늘가에까지 물들여간다
젖은 눈빛11
-파아란 빛세계로
강너머에는
또 강이 있고
산너머에는 또 산이 있고
강과 산과
인간의 숨결이 무수히 겹쳐
인간세상의 빛을 내는
강을 넘고 산을 넘어
더 밝은 인간세상의 우주로 가야 하리
-도라지 2014년 6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