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어릴적에 상여를 본적이 있고 상여로 관을 메여내가는 광경을 직접 목격했었으며 <무시무시>한 상여막에도 호기심으로 접근해본적도 있었다.상여란 어구는 민속에 접촉하면서 부터 알게된것이고 그전에는 <황디>,<황두>,<행두>라고 들어었다.나는 1987년에 룡정조선족민속박물관에서 근무하면서부터 조선족민속연구사업에 종사하게 되였으며 민간조사를 하면서 생각밖으로 <황디>를 재차 목격하게 되였다.상여라 함은 조선족의 전통적인 상례에서 죽은사람을 메여 내가는 필수적인 도구이다. 현재 나이 어린축들은 보지도 듣지도 못했을것이고 나이많은 분들도 기억으로나 남아 있을지 상여에 대해 거론할때가 거의 없다.어릴때는 무서워서 접근못했지만 지금에 와서는 우리민족의 문화유산이란 차원에서 친근감을 느끼면서 아주 가까운곳에서 그것도 직접 만지면서 그젯날 조상들의 넋을 떠올리였다.
나의 고향은 훈춘이여서 자주 훈춘지역을 들락거리였다. 1989년에 룡정조선족민속박물관에서 근무한지 3년만에 또 한차례 훈춘에 방문갔다가 우연하게 당시의 마적달향에 <황디>가 있다는 소식을 듣고 인츰 박물관에 알리고 조사를 진행할것을 제의 하였다.3명으로 구성된 룡정조선족민속박물관 조사일군들은 마적달향에 도착하여 쉴 사이도 없이 <황디막>으로 달려갔다.현장에 도착하여 실물을 보는 순간 놀라움을 금치못하였다. 1930년에 제작된 상여가 눈앞에 나타났던것이다.나의 고향마을 상여와는 다른 인형도 있고 새도 있고 그림도 있는 상여였다.아쉽게도 유물수집에만 급급하다보니 상세한 내용조사는 못하고 그렇다할 기록도 남기지 못하였다.허나 조선족의 대표성적인 문화유물인것만은 사실이였다.현재 이 유물은 룡정조선족민속박물관에 소장되여있으며 이미 국가1급문화유물로 등재되여 있다. 20여년이란 세월이 흐르면서 보관장소가 합당하지않은 탓으로 많이 좀이 먹어들어 갔고 시급히 수리해야할 지경에 이르렀다.
2008년 연변박물관에서는 조선족민속전시를 새롭게 꾸리면서 룡정조선족민속박물관의 상여를 본따서 김광혁이란 공예미술가를 초청하여 원모양대로 복원해놓았다.대채의 길이는 4.3메터정도이고 너비는 75센치메터였다. 몸체의 길이는260센치메터,너비는 75센치메터,총높이는125센치메터였다. 조각품으로는 룡두 2개,오리모양의 큰새 4개,오리모양의 작은새 16개,선비인형1개, 동자인형2개이다. 그림으로는 앞 룡수판(룡두를 올려놓는 반원형 나무판)에 그린 물고기가 룡으로 화한 그림,뒤룡수판의 련꽃,물고기 그림,란간에 그려진 매화,국화 꽃무늬가 있었다.
연변박물관민속연구부에서 근무하면서 2007년부터 나는 연변지역 민간조사를 규모있게 진행하여었다.조사주제는 상여가 아니였지만 상여를 적지않게 발견하게 되었다.새 세기에 들어서면서 조선족의 장례방식은 많이 바뀌였다.나라적으로 화장법을 제창하는 바람에 전통적인 토장법은 거의 사그러져 갔고 깊은 산간마을에서만 아직도 가담가담 토장법은 계속 실행하고 있었으며 상여도 어느정도 사용한다고 한다.지금에 와서 상여가 있어도 멜 사람도 찿기 힘든 상황이며 동력운수도구를 사용할때가 더욱 많다.2007년 가을 룡정시 부유향 하마래촌(현재 부유향을 취소하고 삼합진에 합병)을 조사하면서 우연하게 <황디막>을 지나게 되였는데 1970년도에 제작된 소수레에 조합해서 만든 상여를 발견하였다.동네로인들과 문의하였는데 하마래촌의 김종식(1939년생)로인이 만든것이라 한다.김종식로인은 하마래촌에서 태여나서 어릴때부터 목수일을 익혀왔으며 문화대혁명초기에 원래의 상여가 없어지자 수레에다 상여를 조합하는 착상을 내놓아 산길에서도 쉽게 오르내릴수 있는 중국조선족들에게만 있는 새로운 상여를 만들었다.그 상여구조를 보면 조선족전통의 살림집지붕을 본딴것인데 가옥형상여의 일종이라 할수 있다.아쉽게도 이 상여는 그 당시 크게 파손되였는데 타민족의 페품수구하는 사람들이 <황디막>에 들어가 수레의 축과 바퀴테의 쇠붙이만을 빼내갔고 상여를 분리해서 사처에다 널어놓았다.조선족들은 옛날부터 황디막에 보통 접근하지 않았으며 아이들이 그 근처에서 장난질하는것도 제한하였다.그래서인지 아무리 오랜세월이 흘렀어도 인위적으로 상여가 파손되는 현상은 매우 드물었다.나는 마을사람들과 함께 널려져있는 상여부분품들을 황디막에 들여놓아 어느땐가 수집해가려고 하였다.헌데 그 이듬해 재차 갔는데 그 나머지 마저도 불을 때려고 누군가가 가졌갔다 는것이였다.이렇게 이 특이한 상여는 사진으로만 남아있게 되였다.하마래촌은 도시의 화장터와 거리가 너무 멀어서 지금도 토장법을 행하고 있는 실정이다.인젠 전통식 상여로 장례를 치를수가 없게 되였다.
2008년 가을,나는 훈춘시 마적달향(지금은 합달문향과 합병) 마적달촌으로 내려가 재차 민간조사를 진행하였다.본촌의 진장춘(당시71세),정기수(당시62세)두 로인의 안내하에 마을서북쪽에 위치한 <황디막>으로 갔다.<황디막>은 기둥과 지붕만있고 벽은 없었다.비나 눈을 막기위한것이였다.이 마을의 상여는 그 구조가 매우 간단하였는데 나의 고향마을의 상여와 흡사했다.대채와 몸체로 구성되였는데 대채는 그 규격이 길이가 410센치메터이고 너비가 70센치메터였다.몸체는 기둥과 보로 이루어졌는데 조선족가옥구조와 비슷했다.몸체의 규격을 보면 길이 200센치메터, 너비70센치메터,높이68센치메터였다.몸체중간에 관을 놓게 되였는데 관의 규격은 보통 길이가 180-200센치메터이고 너비가 45센치메터이며 높이가 30센치메터였다고 한다.관은 놓은후 몸체 사면은 붉은 천으로 두르고 웃지붕은 흰천으로 쳐놓는다.그리고 흰천으로 품바를 만들어 관을 메게 앞뒤채에다 열십자로 동여 매놓는다.
2009년 음력설이 금방 지난후 나는 왕청현 천교령진 태양촌(원래는 동신향에 속했는데 후에 동신향이 취소되고 천교령진에 합병)을 조사하였다.태양촌은 20세기30년대에 일제의 강제이주로 인해 생겨난 집단부락이였다.주로 조선반도경상북도 안동,문경에서 많이 이주해왔는데 지금도 경상도말씨를 사용하고 있다. 태양촌 서북쪽 강변에 <황두막>(상여를 보관하는 막집)이 세워져있다.지금도 상여가 보관되여 있다.현재의 매장법에 의하면 이곳 주민들은 화장법이나 토장법을 모두 채용할수 있다.허나 지금은 토장은 거의 치르지 않고 화장하는데 연길이나 도문의 화장터로 가야한다.태양촌에 원래 오래된 상여가 있었는데 문화대혁명시기에 없어졌다가 1970년이후에 로인독보조에서 다시 원래의 모양대로 만들었다.이곳의 상여는 기타 지방보다 많이 다르다.이 상여를 만든이는 태양촌의 72세 되는 신창순로인인데 태양촌에 살다가 지금은 동신촌에서 멀지않은 하동촌에 이사하였다고 한다.신로인은 목수재간이 있고 경상북도에서 전해진 모양을 본따서 만들었다고 한다.전문적인 상여조직도 있었는데 지금은 로인협회에서 관리한다.그전에 상여소리를 하는 로인들도 계셨는데 모두 세상뜨고 가석하게도 후세에 전해지지 못하였다. 상여의 형태로 보아 전체적인 형상이 가마처럼 생긴 상여로서 본체 지붕의 위치에 자리한 덮개의 형태로 보아 자라의 등처럼 둥근 형태로 생긴 별갑형(鱉甲形)상여인듯하였다.조각품은 란간에 꽂혀있는 쐐기인데 머리쪽에다 봉황(닭인듯 싶다.)과 물고기를 그렸다.그리고 지붕앞뒤면에 각기 두마리의 룡과 두마리 학을 그려놓았다.지붕중간에 붉은 룡주를 달아놓았다.색조는 오방색을 취하였는데 대채는 누른색,지붕은 누른색,기둥과 보는 푸른색,란간은 붉은색을 칠하고 몸체에는 검은색천을 두르고 푸른색,누른색,붉은색천으로 장식물을 만들어 달아놓았다.휘장은 흰색바탕에 변두리에 하늘색을 대였으며 네귀에 푸른색,하늘색,누른색,붉은색으로 조합해 만든 장식물을 달았다.현재는 상여를 별로 사용하지 않는다고 한다.
2010년에 들어서서 나는 민간조사내용과 문헌자료에 근거해서 상술한 상여에 대해 력사적,구조적, 공능적면에서 어떠한 차이점과 공통점이 있는지 분석하면서 그속에 담긴 문화적함의에 대해 터특해보려 애썼다.상여는 저승(亡者)과 이승(生者)령역, 그리고 신성(祖上神) 령역과 일상 령역의 통합, 또는 전이 단계에서 존재하며 그렇기에 상여와 그 장식물은 이 량자적 령역을 동시에 수반하는 속성을 갖는다.죽음은 두려움이나 부정의 대상이 아니고 삶의 또 다른 연장선이다. 상여는 상례 문화 안에서 가장 큰 의례용구이며 그 장식으로 인해 화려함과 더불어 가장 구체적인 형상물이 제시되는 상징 공간이다.그러기에 상여는 저승과 이승을 이어놓는 역할을 하며 삶의 연장선이라 할수 있다.룡정조선족민속박물관에 소장되여 있는 상여는 비교적 대표적인 장식물이 부착된 나무공예품인것이다.상여의 몸체의 지붕꼭대기에 꼬인 룡두가 앞뒤로 향하게 놓여 있고 룡몸뚱이 우에는 선비인형과 동자인형이 박혀있다.룡두를 받치는 룡수판에는 룡으로 화한 물고기, 련꽃과 물고기가 각기 그려져있고 배경으로는 산,물,구름이 그려져 있었다.몸체 네귀퉁이에는 오리모양의 새 네마리가 조각되여 꽂혀 있고 란간을 고정하는 쐐기머리는 오리모양의 작은 새로 조각되였다.란간에는 사군자의 일종인 매화,국화가 그려져 있었고 물결무늬가 보인다.여기서 인형은 망자를 인도하는 시자(侍者)라 볼수 있고 새들은 삶과 죽음을 넘나드는 령혼의 안내자라 볼수 있다.왕청현 태양촌의 상여에는 그려진 봉황과 물고기가 보이고 룡과 학 그림이 보이며 해와 산,구름도 보인다.이러한 상여장식물들은 삶의 소망을 담아 죽음의 부정적 측면보다는 죽음을 통해 삶이 연장될 것이라는 삶에 대한 축복의 함의로 묘사되는 것이다. 옛날엔 여러가지 소재로된 자연적인 문양들이 장소나 내용에 맞게 제작되였으며 부귀다남(富贵多男), 부귀공명 (富贵功名),무병장수 (无病长寿) 등의 의미와 같이 서민들의 삶에 대한 애착과 소망을 담아 일상 기물과 같은 친숙한 소재에 상징적으로 표현되였다.
나는 상여에 대한 조사와 연구를 하면서 상여는 다만 사람이 죽은후 시체를 운반하는 도구로서가 아니라 문화적함의가 농후한 공예품으로 보아야 한다고 느끼였다.장시기동안 인간의 삶과 죽음의 령역에서 령혼을 이어주는 역할을 착실히 해오면서 현재 상여는 비록 일상생활에서 도외시될때도 많았지만 신비하면서 상징적인 표상물로서 매우 큰 인상을 남기였다.조선족의 상례문화에서 빠뜨리면 안되는 상여는 현재 흔적으로만 남아있어 어느땐가 소실되지않을가하고 우려심이 들때가 많았다.상여를 박물관의 소장품만이 아닌 민간의 민속문화에서의 표연예술품으로도 활용되였으면 하는 바램도 있다.어떻게보면 정중한 상례의식이 아니라 예술이 담긴 표연항목으로 재현하는것도 바람직한것이다.
동자인형(복제품)
룡두와 인형(복제품-원품은 룡정민속박물관에 소장)
룡수판에 그려진 련꽃과 물고기(복제품-원품은 룡정민속박물관에 소장)
룡으로 화한 물고기형상,어화룡문자(복제품-원품은 룡정민속박물관에 소장)
사군자무늬중의 국화(복제품-원품은 룡정민속박물관에 소장)
1930년에 제작된 상여.훈춘시 마적달향에서 사용하던것인데 1989년에 룡정조선족민속박물관에서 수집,소장하고 있음.
새 조각품(복제품-원품은 룡정민속박물관에 소장)
새 조각품(복제품-원품은 룡정민속박물관에 소장)
선비인형(복제품)
봉황과 물고기문양(왕청현 태양촌상여의 부분품)(1)
왕청현 천교령진 태양촌 서북쪽에 위치한 상여막
왕청현 천교령진 태양촌에 보존되여 있는 상여(2009년)
지붕뒷면에 그려진 두마리의 학(왕청현 태양촌 상여)
지붕앞면에 그려진 서로 마주 향한 두개의 룡두(왕청현 태양촌의 상여 문양)
룡정시 삼합진 하마래촌에서 1970년에 제작한 수레에 조합한 상여(2007년)
하마래촌에서 제작한 상여의 부속물-혼백함
훈춘시 합달문향 마적달촌의 상여-대채
연변향토문화연구회 한광운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