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족이 해란강지역에 이주해 온지도 어언간 150여년이란 력사가 흘러갔다.이 지역은 여러력사조대에 걸친 인류의 생존 흔적들이 많이 남아있고 또한 우리민족의 삶의 보금자리로 점찍혔다.특히 조선족이 조선반도에서 이주해오는 과정에 본 민족의 문화전통을 고스란히 전승해왔을 뿐만아니라 새로운
삶의 터전에 맞는 생활문화도 창조하였다.다년간 해란강지역을 드나들면서 룡에 관련된 전설들도 많이 들어왔고 룡에 관한 지명들을 수두룩히 보아왔다.이를 보면서 우리민족은 왜서 이 지역에 와서 정착해 살면서 룡과 관련된 이러저러한 지명과 이야기꺼리를 만들어냈을가하고 궁금하기도 했다.이를 터득하려고 적지않은 전설집과 연구자들의 론문도 열심히 읽었고 현지답사도 진행하기도 했다.오늘 이 기회를 빌어 필자가 보고 느낀 감수를 피력하려 한다.
해란강지역의 자연과 력사
룡정비암산에서 바라보는 해란강량안에 펼쳐진 황금가을의 평강벌
해란강은 만주족언어로서 <비술나무>라는 뜻이다.해란강은 남강산맥 동쪽 기슭에서 발원하여 화룡시,룡정시,연길시경내를 경유하여 부르하통 하에 흘러든다.해란강의 총 길이는 85키로메터에 달하며 장인강(長仁江), 복동하(福洞河), 륙도하(六道河),등 지류들이 주입되며 입쌀의 명산지로 불리우는 평강벌(平崗平原) ,세전벌(瑞甸平原)을 적셔주고 있다.
해란강지역에는 먼 원고시대부터 인류가 살고있었다. 목전 평강벌 해란강량안 구역내에서
발견된 부동한 력사시기 인류문화의 유적은 20곳이나 된다.그중에는 지금으로부터 약 5000년전의 신석기 시대로부터 청동기시대,철기시대,발해시기,료금과 명나라등 력사시기의 유적、산성、
사찰、 무덤등 유적이 분포되여 있다.수천년동안 내려오면서 당지 주민들은 해란강지역의 기후와 지리환경에 적응하면서 농경을 해왔으며 정착생활을 해나갔다.기원전5세기경부터 이 지역에 북옥저인들이 집거해 살았는데 력사기재에 의하면 북옥저인은 우리민족의 선조로 일컬는 예맥족의 한갈래이고.부여와 동족이라 하며 후에는 고구려의 통치를 받아왔다.북옥저는 후에 백산말갈로 바뀌였다.그후 해란강지역은 발해,료금,원,명,청등 봉건왕조의 지배권에 속해있었다. 청나라중기 해란강지역도 만주족의 봉금지역으로, <룡흥지지(龍興之地)〉로 지목되여 근200여년간 정착주민이 살고있지 않았다.그러다가 19세기중엽에 이르러 조선의 빈곤한 농민들이 살길을
찾아 이곳에 이주해와 살기 시작하면서 우리민족의 새로운 삶의 터전으로 만들어졌다.
조선족이 이주해 들어오기전 해란강지역에는 룡과 관련된 지명들이 존재하지 않았으며 또한 룡에 관련된 전설은 더구나 들을수 없었다.헌데 19세기에 들어와서 조선인들이 한호 두호 모여살면서 오붓한 마을들이 련이어 이루어졌고 이 지역에 모여살면서 사람들은 어쩐지 신비감도 들고 오붓한
생활을 영위하는데 알맞는 보금자리로 느껴졌다.룡정의 비암산에 올라서서 동쪽을 바라보면 세전벌이 넙게 펼쳐져 있고 서쪽을 바라보면 평강벌이 아득히 뻗어져있다.그 사이로 해란강이 꿈틀거리는 룡마냥 이 두평원을 가로지나며 정말로 농사잘 되고 살기좋은 고장이구나하는
느낌을 받는다. 필자가 연변의 지명지들을 들춰보면서 유독 해란강지역에
룡자가 붙은 지명들이 많이 존재했고 그리고 룡정을 둘러싸고 룡의 전설도 수두룩히 만들어져서 민간에 전해져내려왔음을 감촉하였다.이러한것들은 우연적으로 생긴것이 아니라 우리민족의 전통문화의 전승과 관련이 있지않게는가 하는 생각도
든다.이 점에 한해서 연변의 허다한 문인들이 일찍부터
많이 조사하고 연구해왔고 여러가지 창작품들이 발표되기도 했다.
세전벌과 평강벌은 벼의 명산지로 소문이 자자하다.일찍 원고시기부터 인류는 이 지역에서 농경을 해왔고 조선족이 이주해와 살면서 수로를 파고 논뚝을 쌓으며 벼종자를 뿌리여 그 전에 볼수없었던
수전농사가 보편화되기 시작하였다.청조광서년간 해란강지역의 입쌀은 어곡미로 지정되였고 현재에 들어와서 더욱 소문을 놓아 중남해의 지정입쌀로 부상되였으며 주민들이 선호하는
록색산품으로 되였다.
이런저런 자연과력사배경하에서 살기좋은 해란강지역에 룡문화가 주입되지 않았는지 판단이 가기도 한다.
기름진 60리 평강벌은 가을들어 온통
흐뭇한 황금물결속에서 출렁이고있다. 잘 익은 벼이삭들이 머리숙여 풍년을 알리고 일년내내 땀흘려 소중하게 가꾼 논밭을 바라보는 농부들의 마음도 흐뭇하다.-길림신문 2007년9월24일
룡두산과 발해유적지
룡두산은 그리 높지않은 평지산으로 어느때부터 룡두산이라고 불리운지는 딱히 알수없지만 조선족이 이주해들어 와서 불리운것만은 사실이다.해란강과 복동하사이에 끼여져있는 룡두산은 복동하가
감돌아 흐르면서 해란강에 주입되고 좀 멀리서 굽어보면 확실히 한마리의 룡이 머리를 쳐들고 서쪽을 향해 엎드려있는 듯한 느낌을 준다.
현재 중국이나 한국 조선 일본등 나라들에서 주목하고있는 발해력사와 관련된 유적들이 해란강지역에 많이 분포되여있다. 발해시기의 문화유적은 서고성과 하남툰고성을 포괄하여 속칭으로 허래성、잠두성、 성교고성、 팔가자산성、 군민교사묘터、 동남구사묘터、 룡천동사묘터、
북대무덤、 룡두산왕실묘 (虛萊城、蠶頭城、聖教古城、八家子山城、軍民橋寺廟址、東南溝寺廟址、龍泉洞寺廟址、北大墓群、龍頭山王室墓)등모두 열한곳이 있다.그중에서 룡두산과 룡두산주위에 분포되여
있는 발해시기무덤떼(龍頭山渤海墓群)가 인기를 모으고 있는데 21세기에 들어서서 수차례에 걸친 고고발굴을
통해 발해시기 왕족과귀족들의 무덤유적이라는 것이 판명되였다.해란강을 사이두고 룡두산서북쪽 근10여리 상거한 곳에 서고성 즉 발해중경현덕부(西古城-渤海中京顯德府)옛성터가 위치해 있다.이러한 지리적환경에 수백년력사를 주름잡은
발해국에서 왕궁과 왕족무덤을 선택했다는것은 간단하고 우연적인 합치가 아닐것이다.
중국의 중원에서는 룡을 매우 숭상하고
있다.룡의 문화는 수천년전에 이미 동북지역에 전해졌고 음양오행설과 풍수지리에 대한 관념도 형성되였다.특히 봉건왕조시기 이러한 리념들이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나는데 왕궁을 지을때나 릉묘를 수건할때에 많이 활용되였다. 발해왕국에서도 이러한 문화적견지에서
해란강지역에 왕궁이나 왕족들의 릉묘를 수건하지 않았을가하는 느낌이 든다.1980년대에 룡두산에서 발굴된 정효공주묘(貞孝公主墓)는 발해국시기 전형적인 벽화무덤으로 그 문화적가치는 매우 크다.그후 련이어 왕후 왕족들의 무덤들이
발견되고 묘비석,금띠,금관,삼채인형(三彩陶俑)-아직 발굴보고서가 발표되지
않았음-등 유물들이 발굴됨으로 하여 룡두산은 더더욱 인기를 모으고 있다.이러할진대 룡두산은 풍수지리가 좋은
곳임을 의심할바없다.
우리민족은 해란강지역에 이주해온후
룡두산이나 그 주위의 발해문화에 대해 매우 깊이 료해하고 있었고 우리민족과 혈맥을 같이하지 않아을가하고 판단하기도 하였으며 인간이 번창할만한곳임을
터득하였다. 룡두산주위를 답사하는 과정에 지명에 대해 많이 관심해 왔다.현재 당지에서 법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지명으로 볼때 룡두산주위마을에서 룡자가 붙은 마을이름이 여섯개나 된다.이런 지명들은 룡두산을 에워싸고 말발굽형으로
분포되였다.그 지명들을 보면 룡산 룡강 룡원 룡수 룡호 룡해 (龍山 龍江 龍源 龍水 龍湖 龍海)이다.이러한 지명들은 룡두산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룡강촌에 가서 답사할때 들은 이야기인데 이 촌에는 서로 린근해있는 마을이 또 하나가 있는데
모두 룡두산 북쪽,해란강남안에 위치해 있다.마을 이름을 지을때 두 마을을 합쳐서 룡두산촌이라 이름지었는데 서로 모순이 생겼다.모순의 초점은 서로 자기네들의 마을을 중심으로 촌이름을 달아야 하고 패말도 자기네들 마을에 박아야 한다는 것이였다.그후에 제각기 이름을 달기로 했는데 웃마을은 룡산촌,아래마을은 룡강촌으로 달았다고 한다.이 두마을은 모두 조선족이 모여사는 마을들이다.
1980년대에 세워진
촌명비석,현재 사용하지 않음.
룡두산 발해무덤보호석비
룡두산지형도
룡정지명과전설
<용드레 우물에서 날아오른 룡
푸른 정기 뿜어 일송정 소나무로 약동하느냐
백의숨결 누벼 해란강벽파로 여울치노라
룡정!
만방에 채색구름 서려놓은 아름다운 전설이여!>
이는 룡정향토전설집-룡정전설 첫머리에 실린 시구이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조선족이라면 룡정을 모르는 사람이 거의 없다.
룡정의 지명이나 전설에 관해 많은 학자들이 수십년동안 현지답사하고 자료조사를 진행해왔으며 지명유래나 전설들을 수집정리하여 책자를 묶어 발표를
했다.지난세기80년대이후 개혁개방이 실행되면서 한국과의 교류가 활성화되고 룡정이란 이미지가 더욱 두드러지게 되였으며
한국의 관광객들이 먼저 찾고 묻는곳이 룡정이였다. 확실히 룡정은 조선족의 숨결이 약동하고 민족의 얼을 키우는 전형적인 삶의 터전이였던것만은 사실이였다.
룡정의 력사와 문화는
모두가 이미 알고있는 사실이지만 지금에 이르러서 사람들의 심목에서 점점 담백해지고 있는 실정이다. 이런 상황에서 다시 한번 되새겨보고싶은 충동을 느끼고 그전의 열의가 계속 이어졌으면하는 바램이다.
룡정의 지명유래에 관해 <룡정현문물지>에서는 이렇게 수록했다. <1881년(청조광서7년) 청정부는 이민실변정책을 실시하고 1883년 조선리씨왕조는 금월령을 페지하였다.조선의 빈곤한 농민들이 두만강을 건너 오랑캐령을 넘어 륙도구에 이주해와 정착했다.이주민 장인석(張仁碩),박인언(朴仁彦)이 룡정촌(당시 륙도구라 불렀음)에와 살면서 우물을 발견하였다.그 후 한호두호 모여들면서 조선족마을도 되였다.1900년부터 관청이나 민간에서 륙도구와 룡정촌 이란 지명을 병용했는데 1931년 9.18사변후 정식 룡정촌으로 명명하였다.1934년 촌민 리기섭((李基燮)이 선줄을 끌어 촌민들이 자체로 모금하여 기념비를 세웠는데 주위에는 여러개의 돌 기둥을 세워 울바자를 두르고 우물곁에는 비술나무를 심었으며
돌 비석에는 룡정지명기원지우물이란 아홉글자를 중문번자체로 새겨 후세에 기리였다.>
1934년
촌민 리기섭을 선줄로 세워진 돌비석.중국
문화대혁명시기 파괴되였음
1986년 룡정시 정부에서는 재차 기념비를 수선하고 시민들의 휴식터로 만들었다
룡은 중국에서 기린(麒麟), 봉황(鳳凰), 거북이(龜)와 함께 네가지 령리한 신물(四靈)이라 불려온 상상의 동물이다. 룡은 하늘과 물의 상징으로, 번개를 지배하고 하늘에서 비를 내리게 하여 대지를 비옥하게 하고 녀인에게 다산을 보장해 주는 성격을
지니고 있다. 농경사회가 중심을 이루었던 고대사회에서 우주의
규칙적인 순환을 구현하고 지상에 풍요를 분배하는 황제와 항상 관련되여 있었다.룡은 만물 조화의 능력을 갖춘 령물, 권위의 상징 그리고 벽사와 수호의 능력을 갖춘 령험한 동물로서 옛사람들의 생활가까이에 자리잡고 있었다.
조선민족의 력사에도 룡에 관련된 이야기들이 많이 존재하고 룡이 나타나는 꿈은 세상을 호령하는 왕이 태여난다는 뜻으로 간주하였다. 그리고 전통적인 세시풍속으로 전해내려온 룡알뜨기는 조선반도에서 옛날 많이 류행되였다.정월보름날 아침일찍 우물에 가서 달 비낀 우물물 한동이를 길어다 밥짓는 것으로 그해 운수가 대통하고
농사가 대풍이 들게끔 빌어왔고 룡의 신력을 의심치 않았던것이다.부녀자들은 제일 먼저 우물물을 떠오기 위하여 전날밤을 뜬 눈으로 지새운다.
이러한 전통적인 관념과 문화가 19세기 중엽에 중국에로 이주할때 고스란히 옮겨져 오게되였고 룡정에서 신비한 우물이 발견되자 이 고장을 룡의 령기가 서린 아름다운 보금자리로
인식하게 되였다.따라서 룡에 관련된 전설들이 만들어져 오래동안
전해져내려왔을 것이다.
연변의 유명한 민속학자인 박창묵선생은 <룡정전설에 반영된 전통문화의식>이란 론문에서 룡정전설의 맥락과 전승,그리고 그 문화적인 리념에 관해 투철하게 해석하였다.
<지금까지 전해내려온 룡정전설은 6편이나 되는데 이야기줄거리가 같지않다.김명한이 수집한 룡정전설에는 박씨라는 풍수쟁이가 등장하는데 그는 룡정은 룡이 도사리고 있는 고장이여서
여기에 자리를 잡으면 룡왕의 덕을 입어 수재,한재를 모르고 농사하며 잘 살수있다고 말한다. 안룡정,박석균이 수집한 룡정의 유래에는 룡녀가 등장하여
정준이라는 총각에게 우물 팔 자리를 알려주며 그 곳에 우물을 파자 맑은 물이 솟아나고 룡녀는 승천한다.그러자 사람들은 이제는 룡왕의 덕분에 룡수를 마시며 재해를 모면하고 농시지을수 있게 되였다고 소 잡아놓고
룡왕께 제사를 지낸다.>
이러한 전설내용으로 부터 우리민족의 룡정이란 풍수좋은 고장에 와서 잘 살아보자는 소박한 념원을 엿볼수 있으며 전통적인 신앙의식과 생활습속을
터득할수가 있다.룡정은 이렇게 사람들의 심목에서 잊혀지지 않는
신비한 고장으로 후세에 남게되였으며 우리민족의 전통문화를 이어나가고 깊이 뿌리박게 하는 령지(靈地)로 손색이 없다.
룡정이 생겨나면서 룡정주변에 룡자붙은 마을들이 수두룩히 나타났다.우에서 서술한 룡두산주변 룡자붙은 마을외에도 근 20여개되는 마을이 있다.비록 서로 중첩이 되여 사용하는 마을이름도 있지만 사람들은 가히 분간한다.그 지명들을 일일히 적어보면 다음과 같다.룡광,룡명,룡암, 룡신,룡하,룡동,쌍룡,룡천,룡지,구룡,룡풍,룡강,룡산,룡승,하룡,룡포 (龍光 龍明 龍岩 龍新 龍河 龍洞 雙龍 龍泉 龍池 九龍 龍豐 龍江 龍山 龍升 河龍 龍浦)등등이다. 이러한 지명들도 모두가 해란강이나 그 지류에 위치해 있다.확실히 해란강지역을 조선족의 룡문화 발상지라 하여도 과언이 아니다.아쉬운것은 아직까지 룡에 관련된 민속적인 행사들이 펼쳐지지 않았다는것이다.
맺는 말
해란강지역에 룡에 관련된 문화적인 흔적이 남아있는 원인은 개괄하면 아래와 같지 않게는가고 생각된다.
첫째 조선족이 이주해오기전에 이미 전통적인 룡의 문화를 갖고있었던 것이다.
둘째 해란강지역은 그 자연적인 환경이나 지리위치가 농경을 할수있는 풍수좋은 고장이고 농경을 위주로하는 조선족의 삶의 방식에 알맞는다.
셋째 해란강지역은 고대문화가 집결된 곳으로 한시기 봉페되다싶이한 허허벌판을 조선족이 이주해들어오면서 살기좋은 곳으로 변모시켰고 룡이라는
상상의 신물에 의탁하여 세세대대로 풍의족식하려는 소박한 념원이 이어져 내려왔기 때문일것이다.
연변향토문화연구회
2017년4월27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