료녕성 철령부근의 사타자마을에는 약 700여세대의 조선이주민들이 살고있었는데 마을은 만척회사에 소속되여있었다.
사타자동쪽2.5키로메터 떨어져있는 요보향에는 퇀장 호털보가 거느리는 《국군》퇀부가 있었고 마을남쪽 5키로메터 떨어진 신태자에는 《공안대》와 철도경비대가 있었다.이자들은 쩍하면 사타자에 달려들어 식량을 빼앗고 가축을 잡아가고 녀성을 겁탈하였다.이자들은 또 지주,부농,나쁜놈들과 결탁하여 민족모순을 조작하고 사단을 일으키면서 조선족들을 못살게 굴어 어쩐 사람은 강박에 못이겨 외지로 피신하였다.
마을사람들은 가만히 앉아서 학대를 받는것보다 뭉쳐 일떠나 자기를 보위하는 길을 택하려 하였다. 1945년7월 어느날 신용식의 집에서 4명이 비밀회의를 열고 사회정세를 분석한후 조선족청년의용퇀을 조직하기로 결의하였다.퇀장으로는 신용식,부퇀장으로는 김병순,김도성이 임명되고 아래에 두개 구분대를 두기로 하였다.
미구에 대오는 200여명으로 확대되였다. 대원들은 각 구분대로 나뉘여 팔에 완장을 끼고 손에 곤봉을 들고 마을 어귀,길가,곡식밭 등에서 밤낮 보초를 섰다.그리하여 농민들은 시름놓고 가을걷이를 할수 있었다.그러나 총은 든 《국군》《공안대》《철도경찰》놈들이 마을에 뛰어들어 행패를부리느데는 어찌할 방법이 없었다.
사타자조선청년의용퇀의 건립에 앞서 철령에서는 김교성을 퇀장으로 한 60여명의 조선인독립동맹이 조직되였다. 1945년8월 하순에 사타자조선청년의용퇀 60여명과 철령조선청년의용퇀의 63명이 련합하여 철령의용군을 조직하였다.퇀장에 현동명이 임명되고 그아래에 3개 패를 두었다.각 패는 각지에 분산되여 대오를 무장하고 확대하는 주요임무를 수행하였다.
2개월동안의 노력을 거쳐 보총 400여자루,권총 20여자루,일본군도 50여자루,총창 200여자루 그외 수류탄,탄알,작탄,뢰관,도화선,약품,의료기재 여러상자,일본군용마차 4개,노새와 말 10여필,산포와 야전포 각각 1문,비행기용 기관포 1문을 얻었다.그리고 군용퇀자,외투,옷,신,모자등 군수품도 수태 얻었다.
철령조선의용군은 각지의 사회질서를 유지하고 조선족들의 생명재산을 보호하고 추수작업을 순조롭게 보장하는 면에서 큰 역할을 놀았다.그리고 대오를 늘이는 사업을 활발히 벌려 1945년 10월에는 500여명의 전사를 가진 방대한 대오로 성장되였다.
1945년10월 철령조선의용군 지도부에서는 연안에서 온 간부심청을 개원으로 파견하여 120여명에 달하는 조선의용군 한개 련을 조직하였다.
1945년 10월하순에 철령조선의용군과 개원조선의용군은 《국공평화담판》의 요구에 따라 철도연선에서 20키로메터 떨어진 철령현 쌍수자촌으로 철거하게 되였다.두곳의 조선의용군은 600여명으로 늘어나고 무기장비도 괜찮았다.철령보안사령부의 비준을 거쳐 철령조선의용군과 개원조선의용군을 합병하여 철령조선의용퇀으로 편성되였다. 군사훈련은 연안에서 온 김참모장이 지형,지물,방향학을 강의하고 대렬훈련을 지도하였으며 박참모장은 야외에서의 전투대렬,전술훈련을 지도하였다.
정치사상교양은 퇀정치위원 리홍염이 책임지고 주고 계급교양,형세교육,규률교양 등을 강의하였다.그리고 《조선의용군행진곡》,《적기가》,《3대규률과 8항주의》와 같은 혁명가요를 배웠다. 쌍성자촌에서의 2개월간의 정돈과 훈련을 거쳐 전 퇀 인원들은 정치각성과 사상인식 면에서 심각한 변화를 가져오고 군사자질이 높아졌으며 혁명적열의가 앙양되였다.
1946년 양력설 직전에 퇀부에서는 우리 군이 철도연선에서 후방으로 철거하여 정치사상사업 선전사업을 벌리기로 결정하였다.제4련과 퇀부의 부분적인원을 쌍수자에 남겨 설을 쇠게 한외 기타 3개련은 전부 동원되여 일제시기에 만척회사의 소재지였던 상구연촌과 사타자촌에 가서 선전사업을 벌리게 하였다.
의용퇀전사들은 마을에 이르자마자 우선 애민(애민)활동을 벌리였고 부동한 형식의 모임을 가지고 계급교양,형세교양을 진행하고 혁명가요를 배워주었다.전사들은 군중의 바늘 하나 실 한오리도 다치지 않았다.그래서 군중들은 조선의용퇀이야말로 진정한 인민의 군대임을 깨닫게 되여 참군고조가 일어났다.입대하겠다고 퇀원한 사람들가운데는 16,17세의 소년이 있는가 하면 30여세의 중년도 있었다.
그리고 형제가 서로 입대하겠다고 다투는 일이 있었는가 하면 어린애를 부모에게 맡기고 부부가 입대하겠다고 탄원한 사실도 있었다. 국공평화담판을 파괴한 장개석이 내전을 발동하자 국민당군대가 미친듯이 해방구를 진공하였다.
상급에서는 조선의용퇀이 새로 건립되였기에 전투경험이 부족한 사정을 헤아려 철령에서 후방으로 철거하라고 지시하였다. 철거명령이 떨어지자 대원들의 사상동태는 비교적 복잡해졌다.그것은 대부분 대원들의 부모처자가 본지방에 있어 국민당군대가 쳐들어오면 가정이 화를 입게 되기때문이였다.
이런 실정에 비추어 퇀부에서는 어떤 가족은 대오와 함께 철거하게 하고 어떤 가족은 타지방으로 피신시키고 어떤 대원들은 제대시켜 집으로 돌아가도록 비준하였다.그러나 모든 가족을 다 소개시킨다는것은 불가능하였다.그리하여 적지 않은 가족들이 피해를 면치 못하였는데 김병순과 김도성 두 련장의 가족은 강박에 못이겨 조선으로 피난가고 리호승네 가족들은 사타자촌에서 이집저집 피신해다니다가 할머니와 외동딸이 굶어죽고 어머니,처 그리고 8살난 남동생은 피난민으로 가장하고 겨우 사타자를 벗어나 1948년 7월에 매하구로 왔기에 다행히 살아나게 되었다.
1946년 2월 우리 철령조선의용퇀은 개원에 이르렀다.그때 개원에 주둔하던 팔로군 71퇀과 팔로군 제24려는 이미 개원에서 철거하고 국민당림시현정부가 건립되 괴뢰무장공안대놈들이 밤마다 나와 활동하고 있었다. 퇀부에서는 리봉주와 원 개원헌병대 헌병 신가가 철령조선의용퇀을 환영한다는 명의로 의용퇀의 련이상 간부들을 암살하려 한다는 정보를 입수하였다.이 정보를 받자 인차 해당부문에 가서 조사확인한 다음 그 두놈을 체포하여 총살하였다. 개원에서 음력설을 쇤후 서풍을 바라고 떠난 의용퇀은 이르는 곳마다에서 군중들을 위해 좋은 일을 하고 군중대회를 열고 국제국내형세를 선전하고 혁명의 도리를 깨우쳐주었다.그리고 군민간담회,연극공연 등 다채로운 활동을 벌려 군중을 교양하였다.
그리하여 군중들은 조선의용퇀을 믿고 따랐으며 참군하는 열의가 갈수록 높아졌다.서풍에는 20여세대의 조선족이 살고있었는데 10여명 되는 청년들이 전부 입대할것을 탄원해나섰다.김영택이라 부르는 27살에 난 사람은 일본의과대학 졸업생으로서 서풍 모 병원에서 의사로 있었다.
그는 군의로 사업하겠다고 하면서 결연히 부모처자와 작별하고 참군하였다. 1946년 3월 의용퇀은 산성진을 거쳐 매하구에 이르렀다.이때 대오는 600여명으로 확대되고 무기장비도 괜찮았다.연안에서 박일우,방호산,왕자인 등 로간부들이 매하구로 왔다.1946년3월하순에 매하구한국교민회 회장 류동식의 집에서 련급이상 간부회의가 열리였다.회의에서 퇀정치위원 리홍염은 조선의용군은 중국에 맘아 국민당군대와 싸우게 되며 중국 동북민주련군으로 개편된다고 하였다.그리하여 부대를 재편성하였다.
제1련의 150여명은 반석,휘남에 주둔한 팔로군 70퇀의 직속포병련으로 편입되였고 제2,제3,제4련의 450여명은 통화로 가서 동북민주련군 리홍광지대에 편입되였다.
[출처:중국조선민족발자취총서에서...]